Inven 专访李章柱博士谈游戏障碍疾病代码与游戏文化根据
[인터뷰] "게임, 질병이든 문화든 근거가 필요하다" 이장주 박사를 만나다 [3] 이장주 박사는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논쟁이 근거 없는 신념 싸움이 된 것을 비판하며 반증 가능성을 갖춘 여섯 가지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게임 과몰입의 근본 원인을 자율성·유능성·관계성 결핍으로 보고 부모의 감정적 대응 대신 아이의 욕구를 먼저 이해해야 함을 강조했다. 향후 연구에서는 게임이 주는 경외감을 수집해 게임이 문화라는 명제의 실질적 근거를 구축하려 한다....
Inven 专访李章柱博士,其论文提出基于反证可能性的六项层级判断标准,认为当前独立疾病代码化根据不足。他指出游戏过沉迷根源在自主、胜任、关系需求缺失,下一步将收集玩家敬畏感体验以实证游戏的文化属性。

바로 직전 이장주 박사를 만났던 게 올 초다.
정확하게 기억한다. 구로역 근처에 있는 연구소로 향하다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채 어찌저찌 뒷수습을 하고 카센터에서 임시로 빌려준 30만 킬로미터를 뛰었던 차를 몰고 갔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니까. 당시, 이장주 박사는 인벤에서 선정한 2025년 올해의 인물 상을 수상했었고, 이를 축하할 겸 직접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이장주 박사의 관심사는 게임을 둘러싼 단순한 ‘중독/비중독’ 논쟁을 넘어, 게임 이용 장애를 질병 코드로 규정·유지·철회하려면 어떤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지 검토하는 연구였다. 게임 이용 장애를 아무런 반증 가능성 없이 질병 코드로 등재해버리면, 그 여파가 결국 모두의 일상에 미치게 되고,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부작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소모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리고, 9개월 가까이 지난 시점에 이장주 박사의 논문이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화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반증가능성에 기반한 의사결정 나무 접근'
논문이 발표된 이후, 이장주 박사를 다시 찾았다. 9개월의 시간 동안 그는 어떤 생각을 했고, 하나의 연구 매조지된 지금 또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까.
PART 01게임 이용 장애 질병 코드 등재, 찬반 이전에 더 중요한 것질병과 문화를 가르는 판단 기준, 무엇으로 나누어야 하는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건 어렵다. 특히 그 생각이 10년쯤 묵었다면 더 그렇다.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를 둘러싼 논쟁도 그랬다. 한쪽에서는 게임이 문화이자 산업이라고 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게임 때문에 실제 삶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어느 쪽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게 10년간 갑론을박을 이어왔음에도 논점이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장주 박사는 그 이유가 오히려 단순하다고 봤다.
“주장만 가지고는 서로 설득이 안 돼요. 답이 안 나오죠.”
게임이 문화라는 사실을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게임 이용으로 문제가 생긴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서 게임이라는 문화 전체를 질병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동안의 논쟁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붙잡고 상대에게 “당신이 잘 몰라서 그렇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게임 과몰입을 둘러싼 논쟁은 논리와 근거, 팩트를 통하기보단 감정과 목소리 크기에 의해 갈리는 요상한 싸움이다.
이장주 박사는 이번 연구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다. 누가 맞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나오면 생각을 바꿀 것인가.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증거가 나왔을 때 질병 코드 도입을 반대할 수 있는지,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반대로 어떤 근거가 제시됐을 때 자신의 입장을 접을 수 있는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반대하지만, 이러이러한 증거가 나오면 찬성으로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해야 뭔가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얘기를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잖아요. 이 문제가 논리적 대립이 아닌 감정과 신념 싸움에 가깝다는 거죠.”
생각해보면 과학에서 그리 낯선 방식도 아니다. 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적 명제의 중요한 조건으로 ‘반증 가능성’을 꼽았다. 어떤 주장이 과학적이려면 그것이 맞다는 근거만 쌓는 것이 아니라, 어떤 증거가 나왔을 때 그 주장이 틀렸다고 인정할 것인지도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사실이 나와도 결론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검증 가능한 가설이라기보다 신념에 가까워진다.
이장주 박사가 “종교나 정치 싸움으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게임이용장애가 질병이라는 주장 역시 반증될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질병이 아니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먼저 무엇이 확인돼야 입장을 바꿀 수 있는지를 정해야 한다.
그가 논문에서 제시한 것은 여섯 가지였다. 다른 정신적 문제와 분리되는 독립된 질환인지, 진단 기준과 도구가 달라도 비슷한 대상을 가려낼 수 있는지, 게임 이용이 실제 기능 손상의 원인인지, 문제가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되거나 재발하는지, 독립된 질병 코드가 기존 지원보다 실제 회복에 더 도움이 되는지, 마지막으로 질병 코드 도입의 사회적 편익이 낙인과 자원 왜곡 같은 비용보다 큰지를 차례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여섯 조건은 단순한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앞선 조건의 충족 여부에 따라 다음 판단이 달라지는 위계적인 의사 결정 구조로 설계됐다.

그리고 현재까지 축적된 연구를 이 기준에 대입했을 때, 이장주 박사의 판단은 분명했다. 현 단계에서는 게임이용장애를 독립된 질환으로 코드화할 근거와 질병 코드화가 추가로 가져올 실질적인 이득이 충분히 안정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 역시 최종적인 ‘반대’ 선언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증거가 더 필요하고, 어떤 조건이 충족됐을 때 지금의 판단을 수정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제시한 잠정적 결론이었다.
이장주 박사는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도입에 반대해 온 사람이다. 그렇다고 결론부터 정해놓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만약 게임 과몰입 질병 코드를 긍정해야만 할 결정적 근거가 있다면, 심정적으로는 반대하겠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이어가겠어요? 그 근거가 타당하다면 난 기꺼이 찬성할 수 있어요. 근거가 확실한데 그걸 어떻게 막아요?”
여기에는 한 가지 구분이 더 있었다. ‘게임 때문에 실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어려움을 독립된 질병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질병 코드의 타당성이 아직 불확실하더라도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치료와 지원은 제공할 수 있다. 반대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독립된 질병 코드가 필요하다는 결론까지 자동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논문에 제시된 의사결정 나무 역시 개인의 치료 여부를 판단하는 임상 알고리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질병 코드라는 분류 정책 자체의 정당성을 따지는 틀이었다.
여기서 그가 꺼낸 또 하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익숙한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는 얘기였다.
“게임 중독은 익숙한 거예요. 아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가을 하늘이 파랗다는 사실을 안다. 정확히는 ‘파랗게 본다’. 하지만 왜 하늘이 파란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훨씬 적다. 게임 중독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워낙 오래 사용해왔고,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를 보며 수없이 들어온 표현이니 무슨 뜻인지 아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가을이니까 하늘이 파랗지”, “게임이니까 중독되지”.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면 그것 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게임을 적당히 해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적당히가 얼마인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는지, 게임사와 정부, 부모가 각각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적당히 하라’는 말은 결국 관습적 도덕의 한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장주 박사가 더 조심스러워했던 것은 ‘질병인데 놓치는 것’과 ‘질병이 아닌데 질병으로 묶는 것’의 비용이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독립 질환이 아니더라도 우울이나 불안, 가족갈등 등 기존의 심리사회적 지원을 받을 길은 남아 있다. 반면 한번 질병으로 제도화되면 낙인과 의료 자원의 재배분, 다른 개입 방식의 위축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비용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논문은 연구가 부족하거나 결과가 불확실할 때 그것을 곧바로 ‘질병이 아니다’로 처리하지도 않았고, 반대로 독립 질병 코드의 근거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판단을 유보하는 쪽을 택했다.
게다가 질병 코드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문제도 아니다. 국제기구의 기준 하나가 국내 제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보험과 의료, 행정, 병역을 비롯한 여러 영역과 연결될 수 있다. 한번 그렇게 굳어진 제도는 생각보다 쉽게 되돌릴 수 없다. 법조문 하나를 지우는 것보다, 그 법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남겨놓은 인식을 없애는 일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이장주 박사는 셧다운제를 예로 들었다. 제도는 없어졌지만 밤에 게임을 하는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단 한번 만들어 놓으면 잘못됐다는 걸 확인하기도 어렵고, 설령 확인된다 하더라도 복구가 안 돼요. 굉장한 사회적 비용이 소모된다는 거죠.”
결국, 이번 연구는 ‘게임이용장애는 질병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하나 더 보태기 위한 연구라기보다, 그보다 한 단계 앞선 질문에 가까웠다.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그보다 먼저 무엇을 확인해야 찬성할 수 있고, 무엇이 확인돼야 반대할 수 있는지를 정해보자는 것이다. 10년을 싸웠는데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면, 답에 앞서 질문부터 바꿔 보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PART 02왜 아이들은 그렇게 게임에 빠져드는 걸까?많은 부모들의 공통 고민, 과도함의 그림자에는 늘 '부족함'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는 결국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다 큰 어른이 게임을 얼마나 하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중하게 여기지도 않으니까. 게임 과몰입의 질병 코드 등재를 둘러싼 논쟁이 평행선을 이루는 이유 중 하나는 수많은 학부모들이 경험적으로 게임 과몰입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가 있다. 부모 입장에서 볼 때 해결책은 꽤 단순해 보인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하니 덜 하게 만들면 된다. 하루 네 시간을 한다면 두 시간으로 줄이고, 두 시간을 한다면 한 시간으로 줄인다. 얼핏 생각하면 아주 합리적인 계산이다. 그런데 이장주 박사는 여기서 반대로 물었다. 사람은 왜 무언가를 과도하게 할까.
사실 사람은 무엇이든 지나치게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밥도 너무 많이 먹으면 힘들고, 잠도 지나치게 자면 몸이 찌뿌둥하다. 공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하루 세 끼 설탕을 퍼먹으며 행복하게 살 수는 없다. 사람마다 적정량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장주 박사는 꽤 재미있는 말을 꺼냈다.
“과도하게 하는 이면에는 과소가 있어요.”
무엇인가 지나치게 많아 보일 때, 그 뒤에는 반대로 지나치게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배고픔을 예로 들었다. 사람이 언제 밥을 가장 많이 먹을까. 아주 배가 고플 때다. 하루 종일 굶은 사람이 저녁에 밥 두 공기를 먹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냉장고 중독이나 음식 중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일단 충분히 먹게 한다. 배가 차면 자연스럽게 숟가락을 놓는다.

“충분하게 주면 돼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평형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요.”
사람은 부족하면 채우고, 넘치면 덜어내려 한다. 체온도 그렇고 잠도 그렇다. 게임 역시 그 틀에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재미있는 게임을 발견하면 밤을 새워가며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졸면서 화면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이걸 왜 이러고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온다.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영원히 같은 강도로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게임을 계속 찾게 만드는 부족함은 무엇일까. 여기서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심리적 욕구가 등장한다. 자율성은 내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유능성은 무언가를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이고, 관계성은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인정받는 경험을 뜻한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말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활동 대부분에는 이 세 가지가 어느 정도 들어 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하고, 하다 보니 실력이 늘고, 그걸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인정받는다. 재미없기가 더 어렵다.
게임은 이 세 가지를 굉장히 효율적으로 제공한다. 퀘스트를 할지, 사냥을 할지, 다른 곳으로 갈지는 내가 결정한다. 처음에는 못 잡고 실패하던 보스를 어느 순간 잡게 되고, 어제보다 오늘 손이 조금 더 빨라진다. 온라인 게임이라면 친구와 함께하거나,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내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 현실에서는 며칠, 몇 달을 기다려야 얻는 피드백이 게임 안에서는 몇 분 단위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쯤 되면 게임이 왜 재미있는지는 그리 미스터리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심리적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게임에 대한 욕구는 자율성이 통제당할 때 더 강해진다.
“자율성이 100% 발휘될 때가 언제냐 하면, 누가 하지 말라는 걸 할 때예요.”
분명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부모가 방문을 열고 “공부 안 하니?”라고 말하면 갑자기 하기 싫어진다. 스스로 선택했던 행동이 누군가의 명령이 되는 순간부터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게임도 똑같다. 재미있어서 하던 게임이 어느 순간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행동’이 되면 게임 자체의 재미 외에 다른 의미까지 붙는다. '내가 무엇을 할지 내가 결정하고 싶다'는 욕구다. 재미있게도, 오히려 게임을 계속 하라고 권장하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이 경우 '내가 무엇을 할지 내가 결정하고 싶다'는 자율성의 욕구가 반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장주 박사는 특히 지금의 학교를 이야기했다.
“심리적 허기가 가장 심한 곳이 어디냐면, 학교예요.”
학생은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고, 정해진 과목을 공부하고, 정해진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유능성 역시 대부분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에서 확인된다. 친구는 친구이면서 동시에 내신과 입시에서는 경쟁자가 된다. 과거의 학교는 공부를 못해도 친구를 만나러 학교에 가는 즐거움 정도는 있었는데, 코로나 시기를 겪고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그 재미마저 반감되어 버렸다.
“하루 종일 밥은 잔뜩 먹어서 배가 부르고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데, 마음에서는 굶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게임을 켠다. 학교와는 달리 여기서는 내가 고른다. 내가 성장한다. 같이할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빠르다.
“뭔가를 채우기 위해서 인스턴트로 공급하는 데 가장 손쉬운 게 사실은 게임이에요.”

그렇다고 게임이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배가 고프다고 매끼 쇠고기만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게임 하나만으로 모든 욕구를 채우는 것도 균형 잡힌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 왜 게임을 찾는지는 이해해야 한다. 시종일관 나가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사람을 두고, 자제하라는 뜻에서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지워버린다고 외로움이 사라질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장주 박사는 물었다.
“게임을 찾는 이유가 게임이 부족해서일까요?”
아이에게 게임을 덜 하라고 말하기 전에, 게임 안에서 그 아이가 무엇을 얻고 있는지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현실에서는 무엇을 얻지 못하고 있는지도 봐야 했다. 자율성도, 유능성도, 관계성도 거의 주지 않은 채 게임만 빼앗으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게임을 안 한다고 갑자기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다. 그냥 심심하고 답답한 사람이 한 명 남을 수도 있다.
“이런 것도 없이 계속 굶기면서 닦달하면, 그걸 사랑이라고 느끼겠어요?”
게임을 오래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인다. 그 뒤에 무엇이 부족한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먼저 봐야 할 부분이다.
PART 03내 아이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사실 문제가 있는 건 아이가 아닌 '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주구장창 게임을 하고 있는 자녀를 보면 화가 치솟는게 일반적인 부모들의 반응이다.
아이에게 “게임 그만해”라고 말했다. 안 듣는다. 한 번 더 말했다. 여전히 안 듣는다. 목소리가 커진다. 아마 게임을 하는 자녀가 있는 집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는 장면일 것이다. 문제는 이 장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아마 내일도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계속 실패하는 방법인데 계속 쓴다. 이장주 박사는 이 지점에서 아이가 아니라 부모를 먼저 봤다.
“애를 혼내기 전에 부모 멘탈부터 잡아야 돼요.”
게임을 그만하겠다고 했는데 또 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 화가 날 수 있다. 공부해야 할 시간에 게임을 하고 있으면 답답할 수도 있다. 그 감정 자체를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화를 내는 것이 정말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혼이 난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정말 집중해서 공부할까.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지금부터라도 정진해 입신양명하여 효도를 완성하리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말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0%에 가깝다.
화를 낸 결과 남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상한 감정과 나빠진 관계다. 이상한 점은 부모 역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전에도 화를 냈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같은 상황이 돌아오면 다시 화를 낸다.
“그 상황에서 혼낼 수도 있고 다른 걸 할 수도 있는데, 늘 화를 내면 그건 선택이 아니라 감정에 밀려가는 거죠.”

2부에서 이야기했던 자율성이 이번에는 부모 쪽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아이에게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하면서 부모 자신은 화가 나는 순간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문제의 성격도 달라진다. 게임이 아니라 가정의 주도권을 겨루는 힘의 문제가 된다.
부모는 자녀보다 훨씬 큰 권한을 갖고 있다. 무엇을 사줄지, 몇 시에 들어올지, 얼마를 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권한으로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순간, 부모 입장에서는 원래의 문제보다 ‘내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누가 이길 것인가. 그런데 가족 관계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일이 좋은 결말로 이어질 리 없다.
“승자와 패자가 있으면 절대로 오래 갈 수가 없어요.”
부모의 태생적 권위에 늘 지던 아이는 언젠가 커서 들이받는다. 반대로 부모가 아이 눈치를 보며 계속 지는 관계가 된다고 더 좋은 것도 아니다. 결국 핵심은 어느 쪽이 이기느냐가 아니라, 이기고 지는 게임 자체를 그만두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장주 박사가 부모에게 권한 첫 행동은 의외로 소박했다. 3초였다.
“3초만 멈춰요.”
그는 비행기의 산소마스크를 예로 들었다. 기내에 문제가 생겨 산소마스크가 떨어지면 아이에게 먼저 씌우는 것이 아니다. 보호자가 먼저 쓴다. 보호자가 의식을 잃으면 아이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와 아이가 부딪히는 순간도 비슷하다고 했다.
“애를 빨리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자칫 잘못하면 둘 다 위험해지는 거예요. 3초만 멈춰요.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이 상황에 도움이 될까, 안 될까 그것만 생각해도 다른 선택이 가능해져요.”
물론 3초를 센다고 갑자기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십수 년간 화를 내며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인터뷰 기사 하나를 읽고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다스릴 가능성도 없다. 중요한 건 다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은 의지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도서관에 가면 평소 책을 읽지 않던 사람도 책을 펼쳐보게 되고, 운동장에 가면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더 걷는다. 가정도 환경이다.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을 만들 수 있는 환경 중에 제일 중요한 환경이 부모 환경이에요.”
강압적으로 말할지, 부탁할지, 같이 해보자고 제안할지. 같은 목표를 두고도 방법은 꽤 많다. 그런데 게임을 둘러싼 갈등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같은 방법만 반복된다. “하지 마”, “끄라고 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자율성은 더 강하게 자극된다. 이장주 박사는 반대로 먼저 인정하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그는 게임을 이미 꽤 했는데 또 하고 싶다는 아이에게 “정신을 못 차렸느냐”고 시작하지 않는다.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 더 하고 싶구나.”
그리고 묻는다.
“얼마나 더 하고 싶은데?”
욕구를 인정한다는 것이 모든 요구를 들어준다는 뜻은 아니다. 그다음부터 협상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얼마나 할지, 언제 할지, 무엇을 먼저 할지 선택지를 만든다. 그러다 보면 ‘지금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된다. 배고픈 아이가 방금 밥을 먹고 또 배고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화를 내며 “아까 먹었잖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밥을 다시 먹을지, 간식을 먹을지, 조금 기다렸다가 저녁을 맛있게 먹을지를 제안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먹지 않고 기다리는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것과 억지로 참게 된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결국 이장주 박사가 바라본 문제는 ‘게임’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게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성과 소통의 문제라는 거예요.”
아이에게 게임을 끊게 만들 새로운 기술을 찾는 일이 아니다. 게임을 놓고 부모와 아이가 늘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면, 게임보다 먼저 바꿔야 할 것은 그 싸움의 방식일 수도 있다. 아이에게 선택을 가르치고 싶다면, 부모 역시 선택해야 한다. 화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한번 써볼 것인가.
PART 04문화와 질병, 그 극단적 갈림길에서 질병이 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듯, 문화가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게임은 질병인가? 문화인가? 이장주 박사는 최근 발표한 논문을 어떤 증거가 충족되면 게임 과몰입을 독립 질환으로 인정하고 어떤 경우엔 재분류·유보할지를 반증 가능성에 따라 명확한 판단 규칙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게임은 문화다'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잣대를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흥미롭게도, 이장주 박사의 다음 연구 주제가 이것과 맞닿아 있었다.
“게임은 문화다”
게임 업계에서는 꽤 익숙한 문장이다. 너무 자주 들어 이제는 별다른 설명도 필요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장주 박사는 여기에 조금 곤란한 질문을 붙였다.
“도대체 뭐가 문화예요? 게임이 문화라는 걸 뒷받침하는 근거가 뭐죠?”
생각보다 답하기 어렵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서? 시장 규모가 커서? 수많은 사람이 게임 속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문화’라는 말을 증명하기에는 어쩐지 조금 모자라다.
이장주 박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오랫동안 게임이용장애 논쟁을 바라본 경험도 있었다. 게임은 병이 아니다. 게임 과몰입과 질병은 구분해야 한다. 게임에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그런 논리를 아무리 잘 쌓아도 이상하게 제자리였다.
“게임 중독이 있다, 없다만 가지고 하면 잘 싸워야 0이에요. 조금만 밀리면 마이너스고, 잘해도 플러스로 못 가요.”
상대의 주장을 완벽하게 반박해도 출발점으로 돌아올 뿐이다. 게임이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해서 게임의 가치가 새로 생기고 게임이 곧장 문화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먼저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질문부터 달리해야 한다. 게임은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가. 여기서 이장주 박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게임을 끝낸 뒤에도 오래 남아 있는 경험이었다.

이장주 박사가 주목하는 개념, 바로 '경외감(Awe)'이다.
간혹, 우리는 문화적 체험에서 경외감을 느낀다. 너무나 광활한 대자연을 보았을 때, 인간이 쌓아 올린 것이 맞을까 싶은 불가사의를 목격했을 때,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역사적 명작을 대면할 때, 그리고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연주를 듣거나, 수만 명이 입을 모아 노래하는 콘서트 현장에 섰을 때. 클럽 축구에서 모든 것을 이뤄낸 '리오넬 메시'가 끝내 월드컵 트로피까지 들어 올리는 과정을 볼 때. 그 모든 과정에서 느껴지는 황홀경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적 고양을 일으킨다. 그게 문화에서 오는 경외감이다.
“딱 보고 ‘와’ 하는 순간이 있어야 돼요. 그게 경외감이에요.”
게임 또한 비슷한 경험을 준다. 아들이 앓아눕자 혼돈의 블레이드를 다시 쥐는 '갓 오브 워'의 크레토스, '33 원정대'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소피의 고마주(Gommage), '진 삼국무쌍 오리진'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호쾌함, '매스 이펙트'가 그려내는 범 은하적 사명감과 비장함, 그리고 '산나비'와 '투더문'이 선사하는 '지금부터 그냥 울어라' 하는 순간까지.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어떤 게임을 생각하면 아직 선명하게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했던 선택, 내가 이뤄낸 업적, 그리고 그 결과까지 말이다. 게임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몇 개쯤 떠올릴 만한 경험이다.
“1년 전 경험일 수도 있고 10년 전 경험일 수도 있어요. 어느 상황에서 그런 경험을 했고, 그게 이후에 생각이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보는 거죠.”
게임에는 감동도 있고, 숭고함도 있고, 도덕적 갈등도 있다. 좋은 경험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불쾌하거나 괴롭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은 경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이 사람 안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말로 풀면 거창하지만 게임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쉬운 감정이다. 처음 거대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오랫동안 쌓여온 이야기가 한순간에 터졌을 때, 고생 끝에 도착한 장소에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과 음악이 흘러나왔을 때. 말보다 먼저 “와”가 나오는 순간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감정이 그래픽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픽이 좋고, 세계관이 크고, 음악이 훌륭한 것은 재료다. 하지만 실제 플레이어가 느끼는 경외감은 그 전까지 쌓인 이야기와 상황, 인물에 대한 감정, 그리고 플레이어 자신이 직접 해온 행동이 한 곳에 모이며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게임은 다른 매체와 조금 달라진다. 영화는 관객이 보지 않아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음악도 듣는 사람이 음 하나를 직접 연주할 필요는 없다.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움직여야 한다. 문을 열고, 적을 쓰러뜨리고, 선택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해야 그 장면에 도달한다. 그 과정까지 포함해 경험이 된다.
그렇다고 거대한 AAA 게임만 이런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이장주 박사는 퍼즐이든 스포츠든, 흔히 가볍게 보는 게임이든 누군가에게 강렬한 경험을 줄 수 있다고 봤다. 같은 게임이라도 사람에 따라 남는 지점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광대한 풍경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친구와 몇 달 동안 함께 공략했던 보스를 기억한다. 다른 누군가는 별것 아닌 선택지 하나를 10년 동안 기억할 수도 있다.
이 경험들이, 게임이 줄 수 있는 문화적 경외감이며, 곧 게임이 문화라는 명제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 이장주 박사의 주장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그런 경험을 모으는 일이다. 다양한 연령, 성별, 장르의 게이머들이 실제로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지 확인하고, 왜 기억하는지 묻는다. 그 순간 전후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본다. 그것들이 쌓이면 그제야 “게임은 문화다”라는 말 안에 내용이 생긴다. 이장주 박사는 현재의 연구 주제가 바로 이 것이라 말했다.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게임 경험을 물어보고, 게임에서 느끼는 이 문화적 경외의 사례를 직접 수집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장주 박사는 ‘게임은 문화다’라는 말도 그냥 매크로처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상대가 근거 없이 게임을 중독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쪽도 근거 없이 문화라고 외치면 결국 같은 방식의 싸움이다.
“다짜고짜 ‘게임은 문화다’라고만 하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예요. 저쪽에서 근거 없이 ‘게임 중독이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예요. 우리가 똑같이 하면 되겠어요?”
조금 따갑지만 맞는 말이었다. 문화라고 말하고 싶다면 문화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게임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왜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런 경험 가운데 게임이기에 가능했던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10년 동안 게임이 병인지 아닌지를 두고 싸운 끝에, 이장주 박사가 도착한 곳은 조금 다른 자리였다. 게임은 병인가. 물론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게임을 설명하는 유일한 질문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쪽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게임을 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게임은 문화다'라는 문장은 매우 쉽게 읽히지만, 이 또한 '앎'보다는 또 다른 '익숙함'에 가깝다. 진실로 게임이 어떤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충분치 않다. 게임 과몰입이나 부작용에 대한 연구는 물론 필요하지만, 어쩌면 그 만큼이나 중요한 연구가 '실질적으로 게임이 어떤 문화적 경험을 안겨주는가'이다.
지금, 이장주 박사는 그걸 연구한다. 지금처럼 따가운 시선을 받는 놀이 수단 중 하나에서 멈추지 않고, '게임은 문화다'라는 그 문장 자체로 설명될 수 있을 만한 근거를 마련하고, 나아가 '수출액'이라는 지표 이상으로 대한민국의 의미 있는 콘텐츠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来源:Inven Webzine · inven.co.kr